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 베드로 광장 (문단 편집) === 광장의 형태 === 알렉산데르 7세가 베르니니에게 주문한 광장의 용도는, 교황이 [[사도 궁전]]에서 광장에 모인 인파에게 강복할 때, 인파가 교황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베르니니가 처음 설계한 광장의 형태는 [[사다리꼴]] 모양이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설계해 [[르네상스]] 양식을 극대화한 것으로 찬사를 받은 캄피돌리오 광장이 바로 사다리꼴 형태였기 때문에 대선배의 업적을 참고한 것이다. 그러나 목재 구조물을 만들어 광장 예정지에 세워본 결과 광장을 둘러쌀 회랑이 사도 궁전에서 교황이 등장하는 창문을 가리는 것으로 드러나자 사다리꼴 설계는 철회되었다. 광장 예정지에 있던 건물들을 철거하는 작업이 [[1656년]] [[9월 29일]]에 시작되는 동안에도 형태와 규모가 확정되지 않은 가운데, [[1657년]] [[3월]] 베르니니는 사각형 양쪽에 반원 하나씩을 붙인 타원형 모양을 제안했다. 그런데 이걸 본 건축위원회 사람들의 반응이 미덥지 못하자 베르니니는 원 2개를 포갠 타원형 모양, 다시 말해 오늘날과 같은 모양의 광장을 다시 제안하면서 건축위원회와 교황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베르니니는 1656~1667년에 걸쳐 광장을 설계했는데 설계 완성했는데, 광장에 운집한 보다 많은 군중들이 대성당 정면에 있는 강복의 발코니와 [[사도 궁전]]에서 거행되는 교황의 강복 장면을 볼 수 있도록 원 2개를 겹친 타원형으로 평면을 만들었다. 광장의 북서쪽에는 [[1981년]] [[5월 13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저격당한 위치가 붉은색 반암으로 표시되어 있다. 로마 시내의 좁은 골목길을 지나다가 광활한 광장이 갑자기 시야에 펼쳐지게 해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 베르니니의 의도였으나, [[1929년]] [[2월 11일]] 체결된 [[라테라노 조약]]으로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가 화해한 것을 기념해 [[베니토 무솔리니]]가 [[산탄젤로 성]]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이어진 화해의 길(Via della Conciliazione)이라는 대로를 개통하면서 그 길목에 있던 궁전과 성당 및 여러 고택들을 모두 철거해 베르니니의 의도가 빛을 바랬다. [[https://youtu.be/GKqD-mu_c1M|관련 영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